이름만 해도 그렇다. 내가 지은 게 아닌데, 나는 그것으로 평생을 불린다. 물론, 요즘엔 제 뜻에 따라 개명을 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'이름'이라는 큰 범주를 벗어나진 못한다. 그저 발음이 달라지는 것일 뿐. 아무리 발버둥 쳐봤자 우리 존재는 (이름이라는) 몇 글자 안에 봉인되고 마는 것이다.
내가 지은 건 아니지만, 그래도 그 이름엔 염원이 담겨있다.
누가 지었건 간에, 그 이름엔 뜻이 있고 그 뜻대로 살라는 바람이 배어 있으니까.
생각해 보면 나는 내 이름을 '듣는데' 익숙하다.
내 이름을 '말할 때'는 대부분 자신을 소개할 때인데, 그래서일까.
나는 스스로 말하는 내 이름이 낯설 때가 있다.
내가 나에게 낯설다니.
좀 더 그 마음을 헤집어보면 내 이름이 '나'라는 존재를 전부 수용하지 못한다는 방증이 아닐까 한다. 만약, 내 이름이 내 존재 전체를 아우르는 개념이라면 내 이름은 나에게 낯설어선 안된다. 누구에게서 불리든, 내가 말하든 내 이름 석자를 들었다면 그저 고개를 끄덕여야 하며 그 어떤 반론이나 어색함은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.
그래서 이름은 '삶'을 닮았다.
나의 첫 이름은 내가 짓지 않았으나 그저 나에게 주어진 것처럼, 삶 또한 내가 원하지 않았음에도 나에게 주어졌다. 삶을 살아가고 있는 건 나지만, 내 삶이 낯설어 보이는 것도 이름과 삶의 공통점이다. 더불어, 나이가 들면 들수록 그것들이 더 익숙해져야 하는데 오히려 그 반대다. '이름'도 '삶'도. 낯설어지는 경우가 많으면 많았지 더더욱 익숙해진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.
어쩌면, 나이가 들수록 익숙해질 생각 말고 낯설게 나와 주위를 바라보라는 그 어떤 신호일지 모른다.
익숙해지지 못할 것에 미련을 갖지 말고, 나잇값은 하고 있는지 나의 익숙함이 남에게 피해는 주지 않는지 돌아보라는 것.